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 2009, 돌베개

그리고 서울 사당역. 눈길이 가는 곳마다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들 속에서 '희망드림프로젝트'같은 광고가 눈에 띈다. "서울형 복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등장한 신형 복지정책이다. 이 코미디 같은 광고는 '희망 없는 빈곤'이 근본 문제임을 역설하며 희망과 의욕을 줄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 자기성찰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 중요하다며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이 희망드림프로젝트에 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자립의지가 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이 복지정책은 어쩐지 윤리적인 악몽처럼 느껴진다. 빈곤은 어쨌거나 사회적 현실이다. 빈곤을 그냥 부련이나 불행이라 부르지 않고 빈곤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삶 밖에서 들이닥친 현실임을 알린다.그렇지만 놀랍게도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 속에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어울려서도 안 되는 차원이 맞붙는다. 희망이 나의 내밀한 삶의 세계에서 비롯된다면 빈곤은 경제적인 생존을 규제하는 바깥 세계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은 빈곤을 나의 책임과 자율의 세계로 떠넘기며, 빈곤을 낳은 원인을 용케 나에게 돌린다.
내가 못난 탓에 형편없이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유별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제 그런 생각이 어느 한 사람의 변덕스런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원리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희망드림프로젝트가 말하는 복지정책은 희망을 품고 자신을 보살필 줄 아는 개인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복지정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주도적인 창의적 학생을 내세우는 교육정책이나 자기의 인적자산 혹은 경력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라는 고용정책이나 모두 다같이 자신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개인을 겨냥한다. 게다가 자존하고 자립하고 자활하라는 윤리적인 다그침 속에는 네 삶 밖의 세계에 어떤 허튼 소리도 하지 말라는 위협적인 목소리가 깔려 있다. 네 스스로 힘껏 살아보라는 말 속에는 그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속삭임 속에는, 사실은 절망과 분노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는 협박이 숨어있는 셈이다. 만약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우리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자신에 대한 진단과 힐난, 처방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악인보다 더 불편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제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칭얼대고 투덜대며 곧잘 분을 터뜨리는 사람보다 우리가 더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p8-9. 책을 펴내며 중.

1996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노동 및 개인의 책임에 관한 법은 그때까지의 '웰페어(welfare)'와 '사회보장의 지원'을 받던 생활방식을 '워크페어(workfare)'로 전환시켰다. 이 법은 죄의식을 느끼는 실업자에게 '다시 일할 맛이 나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보다 떨어지고 보수도 적은 일자리를 거절하면 처벌을 받게 돼 있다. 국가에서 주는 수당을 받으려면 조건이 어떠하든 간에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 결국 국가가 빈곤층을 위해서가 아니라 빈곤층이 국가를 위해 의무를 지는 형국이 된 것이다.
르몽드 세계사, p133, '가난가의 전쟁인가, 가난한 자들과의 전쟁인가' 중.

2010년 4월 22일 목요일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철수와영희, 2009.

"(...) 더구나 그는 5.18때 광주에서 죽어간, 독재 정권의 직접 폭력으로 살해당한 인민들의 피 값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미움은 더 컸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에게 끝까지 가혹했다. 심지어 8월 15일 특별 사면복권 대상자 7000명 가운데 노동운동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1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 우리가 어떤 정권이 민주적이냐 아니냐를 가늠할 때 그 정권이 과거 어떤 일을 했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 그 정권이 어느 계급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은 서민의 당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정책이란 것은 아무리 급진적으로 해석해도 중도우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때론 시장경제조차 억압하는 독재 정권과 만났을 때 이들이 일시적으로 민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이들은 노동자의 편일 수 없다. 지금처럼 경찰력을 동원한 아류 독재 정권이 집권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용산의 재개발이 시작된 건 현 정권 때가 아니었고, 기륭이나 이랜드 투쟁은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투쟁이란 것을. 개발 자본, 건설 자본, 재벌 자본들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국민회의, 민주당, 한나라당 역대 어느 정권과도 변함없이 동거를 했다. 다만, 편안한 동거였느냐, 조금 불편한 동거였느냐 하는 작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p209.


*노사정위원회 탈퇴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노총의 공식 결정 사항이다. 그해 연말, 전교조 합법화에 대해 노동조합법에 2권으로 합의하고 단식을 풀었는데, 정부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약속을 어기고 1.5권에 특별법으로 만들어버린다. 노사 간 합의도, 노정간 합의도 밥 먹듯이 어기는 그들과 어떤 신뢰를 가지고 협상을 할 수 있는지 회의가 들 수 밖에 없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서 책임 있는 사회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지 못해 사회적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힘을 잃다 보니 노사정위 참여가 사회 참여의 전부인 양 내부 투쟁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힘이 있다면 노사정위 참여같은 건 이토록 목숨을 걸 만한 사안이 되지도 못한다. 그 기구에 참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들러리 소리를 들어가면서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힘이 있으면 대정권 직접 교섭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파들은 지금 우리가 왜 힘이 없게 되었느냐는 근본 질문을 던지지 않고, 노사정위에 들어가야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노사정위원회는 참여 안 하지만 노사정 대표자 위원회는 참석한다는 궁색한 행동들을 보면, 왜 저렇게 체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근육만 키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p219.